울주 언양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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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울주 언양읍성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에 위치한 읍성이다. 고려 공양왕 2년(1390년)에 토성으로 처음 축조되었으며, 조선 연산군 5년(1500년)에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후 광해군 9년(1617년)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른다. 현재 성벽과 옹성이 남아있어 당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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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 언양읍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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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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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울주 언양읍성 |
영어 이름 | Eonyangeupseong Walled Town, Ulju |
종류 | 사적 |
지정 번호 | 153 |
지정일 | 1966년 12월 27일 |
시대 | 조선 광해군 9년(1617) |
소재지 | 울산광역시 울주군 성안2길 55-8 (언양읍) |
면적 | 89,990m2 |
소유자 | 울주군 |
꼬리표 | 울산 동부리 |
개요 | |
축조 시기 | 조선 광해군 9년(1617) |
2. 역사
언양읍성은 고려 말기인 공양왕 2년(1390년)에 처음 토성으로 축조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조선 성종 12년(1481년)까지도 토성이었으며, 당시 규모는 둘레 1489척, 높이 8척, 우물 2개였다.
이후 조선 연산군 5년(1500년)에 현감 이담룡이 석성으로 개축하여 성의 규모가 둘레 3064척, 높이 13척, 우물 3개로 확장되었다.[2] 그러나 이때 만들어진 성은 임진왜란 중에 파괴되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성곽은 광해군 9년(1617년)에 다시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3]
2. 1. 초기 축성 (고려 시대)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따르면, 언양읍성은 고려 공양왕 2년(1390년)에 흙으로 쌓은 토성으로 처음 만들어졌다. 조선 성종 12년(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도 언양읍성이 여전히 토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규모는 둘레 1489척, 높이 8척에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한다.2. 2. 토성 기록 (조선 시대)
조선 성종 12년(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도 언양읍성이 여전히 토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기록된 성의 규모는 둘레 1489척, 높이 8척이었으며, 성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한다.2. 3. 석성 개축 (조선 시대)
석성으로 개축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조선 연산군 5년(1500년)에 현감 이담룡이 기존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이 과정에서 성의 규모는 둘레 3064척, 높이 13척으로 커졌으며, 성 안의 우물도 3개로 늘어났다.[2]그러나 당시 개축된 성은 임진왜란 중에 무너졌으며, 현재 남아있는 성곽은 광해군 9년(1617년)에 다시 고쳐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3]
2. 4. 임진왜란 이후 (조선 시대)
연산군 5년(1500년) 현감 이담룡에 의해 석성(石城)으로 개축되었던 언양읍성은[2]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성곽은 광해군 9년(1617년)에 다시 고쳐 쌓은 것이라고 전해진다.[3]3. 구조 및 특징
언양읍성은 읍성의 한 종류로, 평지에 네모꼴 형태로 축조된 보기 드문 평지성이다.[1] 처음에는 흙으로 쌓았으나 연산군 6년(1500년)에 현감 이담룡이 돌로 다시 쌓으며 확장하였다.[1] 성벽은 조선 전기 읍성 축조의 일반적인 방식을 따랐으며, 현재는 일부만 남아 있다.[1] 이 읍성은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걸친 축성법의 변천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된다.[1]
3. 1. 평지성
언양읍성은 읍성의 한 종류로, 평지에 네모꼴 형태로 축조된 보기 드문 평지성이다.[1] 처음 지어졌을 당시에는 둘레가 약 1000m, 높이가 4m에 이르렀으며, 성 안에는 4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성벽을 이루었던 큰 돌들이 부분적으로 남아 그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1]3. 2. 축조 방식
처음에는 흙으로 성을 쌓았으나, 연산군 6년(1500년)에 현감 이담룡이 돌로 다시 쌓으면서 확장했다.[1] 성벽은 조선 전기 읍성 축조의 일반적인 방식이 반영되어, 큰 돌을 대강 다듬어 쌓고 그 사이 빈 공간은 잔돌로 채워 넣어 성벽의 견고함을 더했다.[1] 울주 언양읍성은 전국의 중요 읍성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14~15세기의 축조 방법을 보여주며,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걸친 축성법의 변화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1]3. 3. 잔존 유적
원래 둘레가 약 1000m, 높이가 4m에 달하는 평지성이었으나, 지금은 성을 쌓았던 큰 돌이 부분적으로 남아 당시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1] 성벽은 큰 돌을 대충 갈아 쌓은 후 빈 공간에 잔돌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1] 특히 남문인 영화루 주위에서 성벽과 옹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1]4. 역사적 가치
울주 언양읍성은 전국의 중요 읍성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14세기에서 15세기에 걸친 시기의 축조 방식을 보여주는 유적이다.[1] 성벽은 큰 돌을 다듬어 쌓고 그 사이를 잔돌로 채우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조선 전기 읍성 축조의 일반적인 특징이다.[1] 이러한 축조 방식은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축성법의 변천 과정을 잘 보여주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1]
참조
[1]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2]
서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3]
서적
다같이 돌자 울산 한바퀴
도서출판 처용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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